한 사람이 일평생동안 가장 많이 듣게 되는 건 아마도 본인의 이름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다른 것과 구별 짓기 위해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른다는 뜻을 가진 이름은 대표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외모와 달리 어느 정도 선택이 가능하다. 간혹 만취하신 부모님의 실수로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의 개성 넘치는 이름을 얻더라도 법을 통한 수정이 가능하다.

이는 게임 속 캐릭터에게도 통용된다. 신작 게임이 출시되면 유저들은 소위 득명(名)경쟁을 펼친다.
캐릭터명의 중요성은 최근 업체들이 게임 내에서 캐시로 판매중인 ‘캐릭터이름변경’아이템만 봐도 알 수 있다. 각종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통해 희귀캐릭터명이 거래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 가상의 인물인 초보게이머 최 씨의 게임 속 일상을 통해 캐릭터명의 중요성을 재구성해보자.
◆“영어님 뭐 하심?”
지난주 군복무를 마치고 2학기 복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최 씨. 부족한건 돈이요 남는 건 시간이라.
결국 온라인게임을 하기로 결심하고 연예인이 많이 등장하는 J사의 길거리농구게임 F에 접속한다. 계정을 생성한 후 게임에 처음 접속해 캐릭터 만들기에 돌입한 최 씨.
포지션을 포워드로 선택하고 캐릭터이름 입력창에 슬램덩크의 ‘엄친아’ 서태웅을 살포시 적었다. 하지만 캐릭터 생성키를 누름과 동시에 ‘서태웅은 이미 존재한다. 다른 거나해라’라는 뉘앙스의 안내창이 뜬다.
홧김에 슬램덩크에 등장했던 30명의 이름을 연거푸 입력해 보지만 결국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본인과의 타협을 결심한다.

그렇게 최 씨가 고심 끝에 만든 캐릭터명은 'seotaewoong1'. 서태웅을 영어로 작문할 생각을 들게 한 대뇌에 감사해 하며 화려한 덩크슛의 꿈을 안고 대기실에 들어섰다. 여기서 부터가 문제의 시작이다.
누구도 최 씨와 같은 팀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심지어 아이디도 아닌 “영어님 나가주삼”이라며 대놓고 최 씨를 거부했다. 결국 접속 20분 만에 간신히 팀을 꾸려 게임을 시작하게 된 최 씨.
하지만 초보 최 씨의 돋보이는 삽질과 연이은 실책으로 게임시작 2분 만에 엄청난 점수 차가 벌어졌다. 결국 팀원들은 비난의 화살을 최 씨에게 겨냥했고 “영어님 뭐 하심?”을 시작으로 “영어야 게임 접어라. 민폐다”라는 등 온갖 굴욕적인 멘트가 8차선 고속도로 위를 달리듯 시원하게 쏟아졌다.
상처 받은 최 씨는 왼손의 엄지와 검지만으로 alt키와 f4키를 동시에 누를 수 있다는 인체의 신비를 경험하며 씁쓸히 퇴장했다.
◆이 죽일 놈의 빈 라덴
최 씨가 다음에 눈 돌린 게임은 C사의 FPS게임 S였다. 현역시절 괴물 같은 사격솜씨로 포상휴가까지 받았던 최 씨. 아직까지 코끝에 은은히 맴도는 화약 냄새와 시원하게 전해지던 반동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길거리농구 게임 F를 통해 아이디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뜬 최 씨는 게임 내에서 악동이나 공공의 적이 되고 싶었는지 수많은 이름들 중에 하필 ‘빈 라덴’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특수문자가 포함된 ‘[빈]라덴’이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개인화기와 튜토리얼을 마치고 바로 실전에 돌입했지만 전장에 뛰어든 최 씨의 개성 넘치는 아이디는 상대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 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어그로로 돌변했다.
여기서부터 상대편의 ‘[빈]라덴 사살 작전’에 목표물이 된 최 씨의 생존을 위한 FPS게임이 시작된다. 급기야 동료팀원들은 공격당하는 최 씨를 못 본 척 지나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조용히 전장에서 빠져나온 최 씨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러려고 가입한 길드가 아닐 텐데
온라인게임을 하면 멍멍이라며 자기최면을 건지 일주일정도 지난 어느 주말.
최 씨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 PC방에서 ‘쭉빵’ 엘프가 온갖 교태를 부리며 타 캐릭터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게임을 발견한다. 친구에게 물어 해당 게임이 B사의 MMORPG W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과 몇 분 후 멍멍이가 되기로 결심한 최 씨는 ‘고운님’이라는 아이디의 키가 작은 뚱보 사냥꾼을 선택했다. 이미 두 차례 실패를 통한 반복학습의 결과였다.
친구와 일주일 넘게 광랩모드에 돌입, 드디어 말을 탈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상대 진영 고랩님들의 위협도 이었지만 그때마다 최 씨는 캐릭터의 작은 덩치를 이용, 나무뒤편에 은닉하는 센스를 발휘하며 위기를 모면해왔다.
하지만 레벨은 높아졌어도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던 두 사람은 사람냄새가 그리웠다고 잠정 결론지으며 길드가입이라는 큰 결심을 내린다.

그렇게 두 사람의 희망은 ‘영어님 영어님 하지 말고 영어 공부 좀해라 새퀴야’ 길드의 새내기 멤버로 이뤄진다.
최 씨는 자신의 서러움을 대변해주는 듯한 길드 명에 강한 소속감은 물론 애정까지 들었다. 또, 자신의 아이디위에 임팩트 있게 떠있는 장문의 글은 캐릭터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작은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냥을 하던 최 씨는 상대진영의 해골무늬 고랩님이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항상 해오던 데로 숨 죽여 나무 뒤에 숨은 고운님. “이번에도 살았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찰라, 고랩님이 나무 뒤편으로 배꼼이 고개를 밀어 넣어 고운님을 바라본다. 간지 길드명을 가리기엔 나무가 너무 작았다.
인사를 하려했으나 상대편의 얼굴은 결단코 친절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전력질주를 선택한다. 하지만 고운님 머리위에는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해골표시가 나타난다. 잠시 후 고운님이 하늘을 보고 눕는다.
결국 연이은 3번의 좌절을 맛본 최 씨는 씁쓸히 PC방을 나와 용하다는 작명소로 발길을 돌렸다.
[이민재 기자 sto@chosun.com] [gam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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