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한 때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할 때 우리는 국가가 정한 틀과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했다. 국가라는 권력이 무섭기도 하고 또 권위를 믿을 수 있었기에. 왜 그 틀과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 묻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국가는 국민 개인의 삶이 누구의 뜻에 의해 정해지기 보다는 스스로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만들어지기를 원하는 시대가 되었다. 개인의 삶과 행위에 대해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최소화되는 것이 선(善)이 된 것이다.
우리의 삶에 누구의 기준과 틀이 적용될 때, 또 이로 인해 생각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면, 이것을 ‘행동의 검열’이라고 한다. 사회적 규범은 개인의 삶을 검열하는 역할을 한다. 검열의 이유는 사회존속을 위한 기본적 가치와 규범의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검열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규범화 시킬 뿐 아니라, 창의적인 개인과 사회 발전의 힘을 약화시킨다.
미국의 디지털 산업과 일본의 전자산업을 항상 개인적 창의성과 사회적 검열로 비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최고의 전자산업을 일으킨 일본이지만, 디지털 산업에서 미국을 능가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재미있게도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온라인 게임산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란이 있다. 게임세계의 검열(형식적으로는 등급판정으로 꾸며진)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게임세계를 개발자와 사용자의 창의적인 공간으로 남겨두어야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현실세계는 어떻게 하기 힘드니, 불쌍한 청소년들을 보호하기위해 온라인 게임세계를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이다. 이런 노력의 최첨단에 있는 기관이 소위 위원을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영상물 등급 위원회(이하, 영등위)이다.
무분별한 온라인 게임의 내용이 청소년의 건전한 사회의식의 함양에 해를 끼칠 것이라는 논리로 무장한 이 위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너무나 급격하게 발전한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 산업을 선도하는데 앞장서왔다. 너무나 잘 하였기에, 정부가 하는 일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학부모, 교원, 시민단체로부터 열렬한 지지도 받았다. 물론, 온라인 게임업체도 영등위가 원하는 조건과 지침에 따라 게임을 개발하였다.
그 결과는? 새롭게 개발되는 온라인 게임은 건전 오락에 충실한 재미없는 시간 죽이기 일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성인물이 되고 말았다. 온라인 게임 세계를 대한민국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공간, 창조의 공간으로 활용할 기회를 없애버리고, 영원히 게임으로만 남게 한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게임을 통해 정말 시간 죽이는 일만 하게 만들었다. 게임업계의 입장에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 속을 꺼집어 낸 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 적어도 개그 콘서트에 ‘언저리 국회’라도 만들어지면 말이다.
현재, 온라인 기반의 컴퓨터 게임에 대한 영등위의 판정과 기준은 4인4색의 개그 콘서트이다. 동일한 온라인 게임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할 뿐 아니라, 기준도 상식적인 수준의 모호함의 극치이다. 자신들의 판정과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과 기준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과거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처럼 국민들의 생활에 대한 기준과 가치를 막무가내로 부여하는 모습만 있다. 이것은 결국 스스로를 논란과 불복종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영등위가 다루는 온라인 게임과 같은 디지털 문화상품은 산업사회의 공장 제품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과 상상이 주된 원료가 되는 디지털 이미지 제품이다.
영등위는 디지털 이미지 제품의 특성을 잘 이해하면서, 이것이 변화하는 사회 가치와 규범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의사소통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등위는 권위주의적 시대의 산물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이 사회에서 존재 이유를 완전히 상실하거나 단지 또 다른 갈등의 근원이 될 뿐이다.
영등위는 단순히 끊임없이 새롭게 나오는 신종 매체와 게임 내용에 대해 심의 기준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완장 찬 사람이 휘두르는 몽둥이의 크기를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심의 기준의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가치와 세계관이 무엇이며 이것이 개별적인 제품의 개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산업계와 끊임없이 의사소통하면서 산업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런 역할을 완장에 의해서만 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2004.04.11)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swha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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