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드 네임 '더블-오-세븐(007)' 제임스 본드는 처음부터 완성된 영화적 아이콘으로 태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소설가 이언 플레밍이 영국 해군 정보국에서 정보장교로 복무하며 축적한 경험, 전후 첩보 세계에 대한 감각, 그리고 자신의 취향과 인생사를 버무려 만들어낸 첩보 어드벤처의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007’은 냉전 시대의 스파이 판타지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고, 원안인 소설을 넘어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으로 확장되며 수십 년 동안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명맥을 이어온 장수 흥행 IP로 자리 잡았다.
특히 영화 속 제임스 본드는 시대에 따라 얼굴과 분위기를 바꿔왔다. 숀 코너리의 능글맞고 거친 스파이, 로저 무어의 여유로운 플레이보이, 피어스 브로스넌의 세련된 냉전 이후형 첩보원, 다니엘 크레이그의 상처 입은 인간 병기에 이르기까지, 007은 늘 당대가 요구하는 스파이의 이미지를 반영하며 재해석됐다. 본드카, 특수 장비, 턱시도, 보드카 마티니, 미치광이 빌런과 매혹적인 본드걸이라는 상징 역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007’이라는 브랜드를 구성하는 문법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오랜 역사가 게임으로 옮겨졌을 때의 결과는 언제나 일정하지 않았다. 007을 소재로 한 게임은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 사막에 파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작품도 있었지만, 비디오 게임 역사를 전체로 두고 봐도 큰 획을 그은 불세출의 명작 또한 존재했다. 다시 말해 007 게임의 역사는 단순한 라이선스 게임의 나열이 아니라, 실패와 혁신이 극단적으로 교차해 온 기묘한 계보에 가깝다.
그리고 이제 그 계보 위에 또 하나의 이름이 오르려 한다. IO 인터랙티브가 선보이는 '007 퍼스트 라이트(이하 퍼스트 라이트)’는 이미 완성된 전설로서의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아직 ‘살인 면허’를 막 얻어낸 젊은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원작과 영화가 쌓아온 007의 상징적인 요소들을 계승하면서도 그가 어떻게 전설적인 요원이 되어가는지를 게임이라는 또 다른 문학으로 풀어내겠다는 시도다.
과연 오랜 세월 동안 소설과 영화, 그리고 게임을 오가며 명암을 모두 경험한 '007'이라는 IP는 트렌디한 최신식 게임 문법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 본드답지 않으면서 본드다운 본드

영화 버전의 감성도 온전히 녹여낸 멋들여진 오프닝 시퀀스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 바로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의 본질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국 비밀정보국 MI6의 요원 제임스 본드가 햇병아리 시절을 거쳐 전설적인 최정예 요원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룬다는 부분이다.
특히 본작의 제임스 본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냉철하고 이지적이며,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완성형 첩보원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퍼스트 라이트에서의 그는 격렬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무리수로 상황을 돌파하는 인물상으로 그려진다.
원작 소설이나 영화에서 익숙하게 소비되어 온 제임스 본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에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하나의 특장점이 되어주고 있었다.

소설과도 영화와도 다른 성격이지만 도박수에 미쳐있는 본드임을 단번에 납득시켜주는 장면

본작에서는 대놓고 플러팅을 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잘 생겨서 여심이 쏠리는 전개로 난봉꾼이 되고 있다
심지어 게임 속에서도 인지부조화는 하나의 메타개그 요소로 쓰인다. 가령 잠입 조사 임무를 맡기 위해 위장 직업을 부여받을 때 보란 듯이 나온 턱시도는 제임스 본드가 아닌 다른 아군 요원이 입고 오히려 제임스 본드는 그의 수행기사를 맡게 되는가 하면, 스릴 중독자처럼 성공 확률이 낮은 도박에 미쳐있는 것은 똑같아도 그것이 조국과 조직의 안전보다는 인명을 중시하는 '자신만의 규칙에 투철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편으로는 소설과 영화 속에서 묘사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잘 녹여낸 부분을 찾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요소였다. 영화에서는 거의 무시되던 원작 소설의 외모 묘사인 '오른쪽 뺨의 흉터' 외에도 공작 활동에서 만능 툴로 사용되는 Q워치는 영화와 동일하게 '오메가' 브랜드의 시계로 등장하거나 본드카의 대명사로 꼽히는 '애스턴 마틴'의 차종이 탈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 저 턱시도가 왜 당연히 네 것이라고 생각한거지?

어차피 모두 동일한 기능을 지원하는 만능 툴이니까 여기서부터는 외형이 곧 성능이다
■ 총 한 자루로 전황을 뒤집는 액션 히어로의 길을 포기한 본드

기물을 부수고 전자기기를 해킹하는 '분탕치는 능력'으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것이 효과적
외부인을 등쳐먹으려는 야바위꾼에게 투시가 되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매운 맛을 보여주자장르적으로 보면 '퍼스트 라이트’는 잠입 요소가 가미된 액션 어드벤처에 가깝다. 사실 액션 어드벤처라는 선택 자체는 매우 안전하고 무난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007 게임들이 중간중간 배치된 퍼즐 요소를 제외하면, 대체로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적진을 돌파하며 무쌍을 찍는 액션 히어로식 연출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작의 방향성은 분명한 차별점을 가진다.
특히 개발사인 IO 인터랙티브의 전작이 ‘히트맨’ 시리즈라는 점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 ‘히트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 대상을 제거하는 플레이를 통해 높은 자유도와 치밀한 레벨 디자인을 증명한 작품이지만,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퍼스트 라이트’ 역시 히트맨의 시스템 위에 제임스 본드라는 스킨만 씌운 게임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퍼스트 라이트’는 그런 우려와는 결이 달랐다. 이 게임은 단순히 그들이 쌓아온 '암살이 주가 되는 잠입 액션'의 공식을 007 세계관에 이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플레이어가 직접 본드답게 판단하고, 침투하고, 속이고, 때로는 과감하게 상황을 뒤집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다.

다 때려눕히는 방식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길인 것은 사실
비열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거라고 해주시겠어요?이러한 방향성은 원작의 설정을 반영한 전투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본드에게 주어진 ‘살인면허’, 즉 ‘라이선스 투 킬(License to Kill)’은 언제든 적대 세력을 죽여도 책임이 면제되는 무제한 면죄부가 아니다. 상대가 먼저 총을 들고 위협을 가하는 전시 상황에서만 사살이 허용되는 일종의 방위권에 가깝다. 본작은 이 지점을 충실히 반영해 대부분의 전투를 은밀하고 신속한 제압, 교란, 회피 중심으로 설계했다. 총격전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기본 수단이라기보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을 때 꺼내 드는 최후의 카드에 가깝다.
다른 잠입 액션 어드벤처 게임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요소는 적과 전면 대치한 상황에서 전투가 아닌 방법으로도 돌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게임 내에서 미션 수행 과정 중 적을 제압하거나 목표를 달성하면 점수를 얻고 이 점수를 사용하면 적을 겁주고 속이며 거짓 항복으로 방심을 유도하는 등 기만전술과 심리전을 적절하게 구사한다면 더욱 쉽게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

일대다수의 상황에 지원병력까지 가세하는 전투는 어렵지만

거짓말과 심리전에 능하다면 동일한 구간을 대놓고 통과할 수도 있다
■ 자유도는 높지만 놓치면 안될 포인트를 제대로 짚은 본드

목적지에 빨리 갈 수 있지만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한 루트

도파민 중독자인 본드라면 참을 수 없지
임무 수행 방식의 자유도 역시 인상적이다. 기본적으로 주어진 목표를 따라가며 선형적으로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주변을 탐색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돌파구가 열리기도 한다. 때로는 더 위험하지만 훨씬 빠른 방책이 제시되기도 하며 보통은 그 방식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코멘트도 따라오지만, 플레이어는 그 틈을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퍼스트 라이트’는 단순한 잠입 게임이 아니라, 허점을 발견하고 기회를 붙잡는 제임스 본드식 임무 수행의 재미를 보여준다.
레벨 디자인도 상당히 절묘하다. 아무 대책 없이 밀어붙이면 후속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반대로 지나치게 신중하게 타이밍만 재다 보면 적들이 몰려들어 빠져나올 수 없는 포위망이 만들어진다. 결국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되,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드다운 배짱으로 과감하게 치고 나가는 판단을 요구한다.

적의 수색대를 의식하여 엄폐 상태를 유지하며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지만
적의 주의가 산만해지는 요행을 기대며 기다리기만 하면 화망이 좁아지며 외통수에 걸리게 된다특히 이러한 판단의 재미는 원작 소설과 영화를 잘 알고 있을수록 더욱 선명하게 체감된다. 퍼스트 라이트를 진행하다 보면 첩보원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적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데, 실제 플레이 역시 그 철학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추격전이 벌어진다면 정석적으로 도로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계단이나 위험천만한 비탈길을 돌파해 추격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식의 선택이 가능하고, 다수의 적과 맞서는 상황에서도 단순히 플레이어의 컨트롤 능력만을 요구하기보다는 주변 사물을 활용한 은엄폐와 위치 변동, 던질 수 있는 것은 죄다 던지는 식으로 투척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훨씬 수월하게 전투를 풀어낼 수 있다. 정면 승부보다는 위험하지만 빠르고, 다소 치졸해 보일지언정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결국 ‘007 퍼스트 라이트’가 구현하려는 본드다움은 단순히 멋진 턱시도와 총격 액션에 있지 않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허점을 찌르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임기응변으로 판을 뒤집으며, 필요하다면 수단과 체면까지 계산해 움직이는 첩보원의 사고방식 자체를 플레이로 체험하게 만드는 데 있다.

원래 이쪽 업계에서 자동차로 계단을 타고 절벽을 넘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운송기를 해킹하여 동체를 흔드는 것으로 적을 강제로 끄집어내고 기절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하다
종합하면 ‘007 퍼스트 라이트’는 제임스 본드라는 오래된 IP를 단순히 현대적인 액션 어드벤처 문법으로 다시 포장한 작품이 아니다.
이 게임의 핵심은 완성된 전설로서의 007을 재현하는 데 있지 않고, 아직 미숙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무모한 신입 요원이 어떻게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정예 첩보원으로 성장해가는지를 플레이 자체로 설득하는 데 있다.
실제로 퍼스트 라이트의 초중반부는 게임 플레이 방법을 단순한 연습장에서 튜토리얼 형태로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점차 강도가 올라가는 훈련을 소화해내면서 플레이어가 본드의 역할에 이입하며 이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으며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과 복식이 바뀌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달라지며 훈련이 끝나갈수록 외모가 말끔해지는 등 디테일하고 세심한 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장르적으로는 잠입 요소가 가미된 액션 어드벤처라는 안전한 선택지를 택했지만, 그 안에서 구현한 플레이 감각은 의외로 선명하다. 과거의 007 게임들이 권총을 든 액션 히어로의 활약에 무게를 실었다면, ‘퍼스트 라이트’는 상황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허점을 찌르며, 필요할 때만 과감하게 총격전으로 전환하는 첩보원의 리듬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IO 인터랙티브 특유의 자유도 높은 레벨 디자인은 ‘히트맨에 본드 스킨을 씌운 게임’이라는 우려를 넘어서, 본드식 임무 수행이라는 별개의 색깔로 재가공됐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본드다움을 단순한 외형이나 상징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턱시도, 고급 차량, 총격전, 추격전 같은 익숙한 요소는 분명 존재하지만, 이 게임이 진짜로 강조하는 것은 결국 '적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먼저 생각하는' 첩보원의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 이 게임에서 제임스 본드는 멋진 연출로만 완성되는 인물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판단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물에 가깝다.
‘퍼스트 라이트’는 단순히 잘 숨거나 잘 쏘는 게임이 아니라, 신중함과 과감함 사이에서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게임이며 이 균형을 받아들이는 순간, 작품은 단순한 라이선스 게임을 넘어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게임 문법으로 다시 해석한 시도라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퍼스트 라이트’는 단순히 잘 숨거나 잘 쏘는 게임이 아니라, 신중함과 과감함 사이에서 적절한 타이밍을 잡는 게임이며 이 균형을 받아들이는 순간, 작품은 단순한 라이선스 게임을 넘어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게임 문법으로 다시 해석한 시도라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결국 ‘007 퍼스트 라이트’는 원작 소설과 영화가 쌓아온 007의 상징을 존중하면서도, 그 상징에 갇히지 않으려는 작품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익숙한 완성형 스파이를 보여주는 대신, 전설이 되기 전의 불완전한 본드를 내세우고,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플레이어의 선택과 임기응변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 명작과 졸작을 오가며 극단적인 평가를 받아온 007 게임의 계보 속에서, ‘퍼스트 라이트’는 적어도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한 이유를 스스로 증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신호현 기자 hatchet@chosun.com] [gamecho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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