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울리마의 창시자 `리차드 게리엇`(좌)
저는 지난달 미국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LA를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게임산업을 둘러본다는 거창한 취지 아래 온라인게임(엔씨소프트), 비디오게임(일렉트로닉아츠=EA), PC게임(블리자드)의 대표 회사가 있는 도시를 각각 방문했습니다. LA는 몇 번 가본 적이 있어 그리 놀라울 것이 없었고, 샌프란시스코는 실리콘밸리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IT기자로서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바로 텍사스였습니다.
여러분은 ‘실리콘힐’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실리콘힐은 하이테크 기업이 밀집해있는 텍사스주 오스틴 지역을 말합니다. 모토로라·AMD·텍사스인스트루먼트·삼성전자 등 반도체 회사들과 IBM·델컴퓨터의 본사 또는 기술연구소가 모두 이 곳에 있습니다. 낮은 언덕처럼 생긴 지형 탓에 실리콘힐로 불리지요.
최근에는 반도체와 컴퓨터로 대표되던 실리콘힐이 온라인게임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오스틴을 방문한 이유도 바로 ‘게임’ 때문입니다.
우선 오스틴에는 국내업체 엔씨소프트의 미국 법인인 엔씨인터랙티브가 있습니다. 또 EA의 ‘울티마온라인’을 개발한 오리진시스템즈, 일본 소니온라인엔터테인먼트의 ‘에버퀘스트’를 개발한 베런트인터랙티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계 1, 2, 3위 온라인게임 개발사가 모두 오스틴에 있는 셈입니다. 게임 매니아들에게는 낯익은 이름인 Digital Anvil, Acclaim, Ion Storm도 모두 오스틴에 있습니다. 이외에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지만, 이 곳 업체들 이야기로는 20~30여개의 중·소 게임 개발회사가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스틴이 게임의 메카로 떠오르게 된 사연입니다. 물론 실리콘밸리가 성장한 데 스탠퍼드대학이 큰 역할을 했듯, 실리콘힐이 생긴 데에는 공과대학으로 유명한 텍사스대학(The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이 기여한 바가 큽니다. 텍사스공대의 우수한 두뇌들이 게임 개발에 뛰어든 것이죠.
하지만 이건 부차적인 문제이고, 오스틴의 개발자들은 이 지역에 게임업체가 많은 것에 대해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바로 “리차드 게리엇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리차드 게리엇은 엔씨인터랙티브의 Executive Producer입니다. 올해 마흔살인 게리엇은 17세이던 지난 1979년 첫번째 게임 ‘아칼라베스(Akalabeth)’를 만들었습니다. 시험삼아 만든 이 게임의 판권을 캘리포니아의 한 제작사가 사면서 게리엇은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그 다음해 그는 ‘울티마Ⅰ’을 만들었고, 이후 계속 시리즈를 냈습니다. 게리엇은 울티마Ⅲ를 자신의 마지막 습작게임이라고 한 후, 1985년 출시한 울티마Ⅳ에서 개발자로서 본격적인 실력을 보여줍니다. 게임 전문가들도 울티마 시리즈의 정수는 울티마Ⅶ라고 말하며, 최고의 롤플레잉게임이라고 말합니다. 게리엇 스스로도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게임이 인기를 끌자 게리엇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뻗쳤습니다. 세계 최고의 게임 퍼블리셔인 EA가 게리엇의 회사인 오리진을 인수한 것입니다. 물론 최고의 대우를 받고 회사를 넘겼지만, 월급쟁이가 된 게리엇은 이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울티마Ⅷ과 울티마Ⅸ은 시간에 쫓겨 미완의 상태로 출시됐고, 그는 울티마Ⅸ이 출시된 후 사표를 던졌습니다.
게리엇은 좀 특이한 인물입니다. 본인을 자칭 영국 귀족이라 부르고, 집에 던전(dungeon:성)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주비행사 아버지를 둔 탓인지, 오지 여행이 취미입니다. 얼마전에는 남극에 가서 ‘리니지’ 깃발을 꽂아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꽉 막힌 대기업 개발자는 어울리지 않았죠. 1년간 세계 여행을 한 후 돌아온 그는 세계 게임업계를 깜짝 놀래키는 발표를 했습니다. 바로 한국의 게임업체 엔씨소프트에 합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게리엇은 울티마 시리즈를 통해 엄청난 게임팬들을 확보했고, 게리엇이 87년 뉴햄프셔에서 오스틴으로 옮겨온 후 게리엇을 좋아하는(존경하는) 수많은 개발자들이 이 곳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게리엇팬들이 오리진에 들어갔고, Chris Robert가 Digital Anvil을, Warren Spector가 Ion Storm을 세우는 등 오리진 출신들이 이 곳에 게임업체를 세운 것입니다. 게리엇을 따라 엔씨소프트의 미국 지사도 LA에서 오스틴으로 옮겨왔으니까요. 게리엇이 오리진을 떠난 후, 오리진에 있던 개발자들도 대거 나왔다는 후문입니다.
한 명의 게임 개발자가 하나의 산업도시를 만들었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요? 하지만 오스틴의 개발자들은 이렇게 말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건너간 엔씨소프트 직원들에 따르면 리차드 게리엇과 그의 가족은 오스틴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실제 저도 이번 출장에서 게리엇을 만난 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스틴의 게임업체를 방문하는 일도 게리엇의 전화 한 통화면 OK였습니다. 이런 인물을 국내 기업이 ‘소유’하고 있다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리차드 게리엇은 엄청난 자본을 가진 투자자도 아니고, 대기업 사장도 아닙니다. 천재 개발자일 뿐입니다. 게리엇을 보며 우리나라에도 직위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 진짜 존경받을만한 개발자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IT조선 / 박내선 기자 nsu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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